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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가 살 길은 기독교 대혁명뿐이다!

박 넝쿨 2014. 3. 7. 08:29

한국 기독교가 살 길은 기독교 대혁명뿐이다!

들어가며

오늘 현재 피폐하게 죽어가는 한국교회들의 원인은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중심 곧 성경의 가장 핵심이 되는 참진리를 뻔히 알면서도 고의로 모르는 체 비켜가고(사명유기) 있기 때문이다.

자칭 몇 십만, 실제 몇 만, 몇 천이 모이는 대형교회가 수두룩한데 한국교회가 피폐하다니!? 남산 타워에서 내려다보면 서울시가 빨간 십자가 물결이고, 부흥(외형부흥)하는 속도와 교회가 많기로 세계 제일이고 선교사 파송도 세계 제일인데 피폐라니!!? 라며 이 말에 분계 하여 정면으로 반박할 목사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죽을 각오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숫자만 많은 것이지 알곡이 없다. 쭉정이가 모인 교회들이라면 그것은 분명 회칠한 무덤일 뿐일 것이다. 교회란 적어도 그 교회 직분 자와 참신자가 모이는 곳이다. 참신자란 그 중심에 예수가 영접되어 있어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의 진리대로만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를 참신자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가 그 뜻대로 살지 못 한다. 왜? 대부분의 목사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시면서 몸소 행해 보이신 대로 성경적으로 가르쳐 진리대로 인도하지 못한 연고다.

몸말

이제 구체적으로 본론을 말하자면, 이 세상, 좁혀서 한국사회, 이 사회에는 반드시 있어야할 인간이 없다. 아니 있었지만 이미 무시무시한 핵무기로도 방어 불가능한 돈! 돈! 황금! 이 괴물에 짓밟혀 확실히 있는 건 돈, 돈, 돈을 모으기 위한 무자비하고 소름 끼치는 죄악이 있을 뿐이다.

국가 제일의 슬로건도 첫째가 경제다. 어떻게 벌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많이 가졌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많이 가진 자가 왕이고 최고다. 이 최고자들에겐 어떤 죄를 저질러도 무서운 벌이 없다. 더러 잡혀 들어간다 해도 연례행사처럼 절기 때마다 풀려난다. 이러다 보니 인성교육의 기본이 되는 인문학이 장사 직전에 다다랐으나 탄식하는 지성인조차 뚜렷이 찾아보기 힘든 세상으로 피폐, 황폐한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이와 같은 세상에 그래도 우리가 최후의 보루로 기대할 희망은 어디일까? 정치계? 어이, 그 냄새! 교육계? 법조계? 철저하게 깡그리 망가져버린 무희망이다. 그래도 최후로 남은 건 종교계 그중 우리 기독교, 썩어 문드러진 곳에 필요한 건 소금의 역할이다.

필자가 가끔씩 하는 설교(인형극선교 공연을 사명으로 하는 목사라 설교 할 기회가 아주 적음.)할 때 마다 교인들에게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우리 믿는 교인들과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다른 점, 즉 생활과 생각의 구별되는 다른 점이 무엇일까?”를 물어본다. 썩은 사회의 소금 역할은 고사하고 종종 터져 나오는 소문에 의하면 썩은 사회를 능가할 죽은 교회들이 더러더러 있다. 가장 일반화 되다시피한 사실로 장로, 권사는 500, 300만원을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려야만 성직을 받을 수가 있으니, 심지어는 가난하여 모처럼 받은 성직을 사양하는 굴욕적 황금논리!

하나님께 드림으로 당연히 받을 축복권의 특권이라 쉽게 생각하겠지만 주님 안에서 양심적으로 판단해서 옛날 카톨릭의 속죄권 매도 행위와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어쩌면 완전히 썩어버린 교회에서는 위의 이야기가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와 같은 인간들의 속성을 이미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통해 그분이 사신 3년간의 행적과 성서로 경고, 타이름, 예언, 희망, 이적 등등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돈과 연관이 별로 없다. 부자들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딱 두 번 부자와 만났을 뿐이다. 그 중 한 사람(눅 19:1-10) 대재벌급 삭개오네 집을 주변의 비난을 무릅쓰고 방문하여 유숙까지 했다. 이유는 죄인의 생명까지 사랑하시기에 영생의 구원을 주기 위함뿐이었다.

또 한사람,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 영생의 길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청년이 부자인고로 근심을 하면서 떠나는 것을 보고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마 19:17-22)고 탄식하셨다. 뿐더러 예수님은 늘 가난한 자의 편에 서셨고 성경 신구약 요소마다 127번이나 고아와 과부, 눌린 약자를 돕고 자선하며 서로 사랑하라 가르쳐 주신 말씀뿐만이 아니라 그 일을 몸소 친히 실천해보이셨다.

또 돈에 관한 하나님의 성경 교훈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교훈해주셨고(딤전 6:10),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커지면 사망이라 경고했고(약 1:1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하라(히 13:5)고 하셨다. 이와 같이 몸소 실천하신 주님의 발자취와 말씀이 현실적으로 너무나 뚜렷이 살아있는데,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자본주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말 3:10), 성구를 인용해 설교를 하는 것을 필자는 기독교 방송 TV를 통해 확실히 들었고 하도 기가 막혀 녹화도 해 놨다.

그러나 필자가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성경에 기록된 “착하고 적은 일에 충성된 종아”하고 말씀하신 그대로 영적 충성심을 칭찬하신 것이라 배웠다. 필자는 분명 자본주의적 이재(理財)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고 신앙심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파 자본주의도 아니고 좌파 공산주의도 아니다. 그리고 가난을 조장하거나 부자를 저주 한 일도 없다. 어리석고 옹색한 필자의 판단으론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니까 사랑주의 그것도 아가페의 사랑주의라 믿고 있다. 다만 하나님의 속성상 좌, 우편의 강약적 경향은 가늠해 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자본주의로 욕보이게 매도(罵到)한 그 목사를 섬기는 교회 교인들이 워낙에 부자 자본가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 한껏 가진 그분들의 자본의 합리 내지는 정당할 수 있는 변호내지는 항변이나 사회법이 판정한대로 남보다는 자신의 배에 기름기가 꽤 차있는 본인들의 합리화가 아닐까?

관련된 또 하나의 사실은, 많은 목사들이 헌금을 강요할 때마다 보도처럼 사용하는 구약 말라기 십일조에 관한 말씀(말 3:10)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면 쌓을 곳이 없도록 주신다는 축복은 1년 내지 한 달 먹을 양식이 아닐는지... 주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분명 일용한 양식이라 되어있다. 그러나 축복증후군 퍼트리기에 혈안이 된 목사들은 한국 자본주의 속성대로 일용함이 아닌 세상의 전부를 독식하여 자손대대로 떵떵거릴 한 끗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혼탁한 흐름 속에 어느새 신선해야할 성전 안에 계급사회가 형성되어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왜?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만인이 평등할 존엄성을 공의로우신 조물주 여호와로부터 부여받았으니까. 모름지기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 있는 것은 말 못하는 풀 한 잎까지도 생을 거스를 권한을 부여한 바가 없다. 사랑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 이시니까. 미생물까지도 그럴진대 하물며 한 생명을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는 우리 인간일까 보냐.

그래서 우리주님은 기적의 부활 후 제자들을 통해 우리 믿는 신자의 도리와 지켜 행할 바 크리스천(christian)의 모델케이스(model case)를 오순절 성령역사 사건으로 보여 주었다(행 2:37-47). 주님의 승천 전에 강권하신 명령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 성령을 받기까지 기도만 하라”(행 1:4-8)는 말씀에 순종하여 약속대로 뜨거운 기도로 이행했을 때, 드디어 성령의 역사가 폭발하여 각 나라의 방언이 터졌고(행 2:37-47), 아가패의 사랑이 가슴마다 가득하여 가진 것으로 서로 통용하는 뜨거운 역사가 불꽃처럼 일어난 것이다. 그야말로 지상 파라다이스(paradise)인 미움이 없고 싸움 전쟁이 없는 낙원, 바로 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오순절 성령의 뜨거운 깃발로 기독교 혁명을 일으키자고 필자는 부르짖는 바이다.

이 혁명이 들불처럼 번져 나갈 때 비로소 그동안 믿던 신자들까지도 점점 떠나가는 기독교, 죽어가는 생명들의 구원의 문까지 가로막히던 우리 교회들이 다시 소생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나오며

우리 한국엔 오순절 교파까지 있다. 그러나 오순절 냄새도 잘 안나는 것 같다. 그리고 목사들이 오순절 설교를 별로 잘 안하는 경향이 있다. 더러 하더라도 전혀 모이기에 힘쓰고 열심히 기도하라고까지는 힘 있게 강조한다.

그러나 빠질 수 없는 핵심인 서로 나누란 복음은 거의 잘 안하고 지나가 버린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강남에 있는 어느 대형교회 젊은 목사의 설교에서 “교회가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교회라는 정의를 새겨 볼 때 여호와께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어떻게 가난뱅이와 하찮은 인간들의 배급 장소가 될 수 있느냐고 얘기하지만, 이는 만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교묘히 정면으로 모독하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지난날에는, 위에 거론했던 오순절 내용의 설교를 하기엔 너무나 소름끼칠 만큼 무시무시하게 악랄한 군부 독재 정치 속에서 민족, 동포, 민중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사상 이념 대립과 북쪽을 교묘히 이용해서 국민 민주화의 저항을 무너뜨려, 막 짓밟힌 비극의 시대를 우리는 살았다

독일 목사의 아들인 칼 마르크스(K. Marx)가 성경의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행 2:45) 이 한 절을 도용해 공산주의를 만들어 세계의 자본가들의 피를 뿌리며 공산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공산당 이론 그 자체만은 너무나 인본주의고 이상적이긴 하나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고선 한동안 도미노 현상처럼 세계가 자본주의 승리처럼 기울기 시작했다.

그렇다. 이제는 물질 만능으로 썩어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어가는 교회들을 살려내기 위해 오순절 성령의 폭풍으로 잃은 양들을 되찾고 사랑으로서 삶을 온전히 구원하는 사랑사업에 매진하시길 목사들에게 간절히 절규하는 바이다.

- 신관홍 목사 (횃불인형극선교단, skwanhong@hanmail.net )